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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 그 혁명의 시작은? (3.15 부정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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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 그 혁명의 시작은? (3.15 부정선거)

4.19 혁명은 1960년 4월 19일에 시민과 학생을 중심 세력으로 하여 일으킨 반독재 민주주의 운동입니다. 4.19 혁명의 결과로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하야하게 되었는데요. 4.19혁명의 과정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3.15 부정선거

3.15부정선거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4.19 혁명이 일어난 배경에는 3.15 부정선거가 있었는데요. 당시 자유당 정권은 이승만, 이기붕을 정통령, 부통령 후보로 내세우고 야당인 민주당은 조병옥과 장면을 정통령과 부통령으로 내세웠습니다. 선거 결과를 미리 분석해 보았던 자유당 정권은 정당한 선거로는 승산이 없겠다는 것을 깨닫고 관권을 동원하여 대대적 부정선거에 대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다가 1960년 2월 15일에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신병치료차 미국에 갔다가 갑자기 사망하여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당선될 것이 확실시되었습니다. 그러자 선거의 초점은 그 당시 노령이었던 이승만의 유고하게 되면 승계권을 가지게 될 부통령 선거로 옮겨졌습니다. 이로 인해 선거 유세가 본격화되어 정부와 여당의 선거운동 방해사건은 계속되었습니다. 당시 지시된 부정선거계획 내용은 40% 사전투표, 3인조 또는 5인조로 반공개투표, 유령 유권자 조작과 기권을 강요, 기권자의 대리투표, 내통식 기표소 설치, 개표 때 환표와 혼표, 투표함 바꿔치기, 득표수 조작하여 발표 등의 부정행위가 행해졌습니다. 그리고 이 부정행위들로 1960년 3월 15일 선거에서 이승만과 이기붕이 각각 88.7%와 79% 득표로 정통령과 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개표과정에서 부통령 이기붕의 표가 100%에 육박하는 결과가 나와 79%로 하향하여 조정하는 어이없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3.15부터 4.19 그날까지 

4.19혁명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투표권을 우롱당한 국민들은 투표 당일 오후 12시 45분에 들고일어났다. 최초로 광주 금남로에서 시위가 일어났으며 이 시위가 광주 3.15 의거입니다. 시민과 학생들이 모여서 '곡 민주주의 장송'이라는 깃발을 걸고 시위를 벌여 진압 과정에서 10여 명이 부상당하기도 했습니다. 마산에서는 아침부터 장군동 제1투표소에서 자유당원과 민주당 참관인 사이에서 실랑이가 벌어졌습니다. 참관인이 투표함을 엎자 그 토표함에서 미리 기표해 둔 용지가 쏟아져 부정선거가 적발된 것입니다. 이에 민주당 도의원 정남규는  등은 10시 30분쯤 선고포기를 선언했습니다. 부정선거에 폭발한 시민들은 오후 3시 42분부터 오동동 민주당 경남도당사와 불종거리 등에서 시위를 하다가 경찰에게 강제 진압당하고, 투표가 종료된 그날 저녁에는 마산시청과 자산동 일대에서 3천여 명이 모여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때 경찰의 집단 발포로 인해 김주열 열사를 포함한 9명이 사망하고 80여 명이 부상당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김주열 열사는 밤 10시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였는데 3월 15일에 실종자로 처리되었다가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어 제2차 마산의거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이후 4월 18일 고려대 학생 천여 명의 학생들이 '진정한 민주이념의 쟁취를 위하여 봉화를 높이 들자'라는 선언문을 낭독하며 국회의사당까지 진출하였으나 학교로 돌아가는 중에 괴청년들의 습격을 받아 일부 학생들이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이에 크게 분노한 전국의 시민과 학생들이 바로 다음날인 4월 19일 총궐기하여 '이승만 하야와 독재정권 타도'를 외쳤습니다. 이승만 독재정권은 총과 칼을 앞세운 무력으로 시민들을 탄압하고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였습니다. 4월 25일에는 이승만 정권의 만행에 분노한 서울 시내 각 대학 교수단 300여 명이 선언문을 채택하고 시민, 학생들과 시위에 동참하였습니다. 교수들의 시위가 끝나고 계엄군이 출동하긴 했으나 탱크를 앞세우고 참검까지하고 방독면을 쓰고도 군인들은 주춤거리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으르 본 시위대 속에 있던 한 10대 소년이 탱크 위로 뛰어 올라가 "대한민국 국군 만세!"라고 외쳤습니다. 이후로 계엄군은 현장에 출동해서도 시위대의 따뜻한 환영과 박수를 받았습니다. 계엄군도 이미 이승만 정부를 지킬 마음이 없어진 상태였으며 계엄군은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의 사병이 아닌 국민을 지키는 군대가 되었습니다. 이승만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26일 아침 김정렬 국방부장관은 이승만에게 하야를 진언했고, 부인이었던 프란체스카도 이를 재촉했으며, 외무부장관 허정도 하야를 권유하였고 이승만은 결국 대통령직에서 하야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