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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스페인 건축의 아버지 안토니 가우디 (Antoni Gau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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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 가우디 (Antoni Gaudi)

안토니 가우디는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건축가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의 많은 작품이 있는 스페인 바르셀로나는 관광지로 많은 인기를 얻고 있고, 바르셀로나를 찾는 많은 사람들이 안토니 가우디의 작품을 기대하며 그곳에 가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안토니 가우디의 생애와 그의 작품 몇 가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i)

안토니 가우디 (Antoni Gaudi)의 생애

가우디는 1852년 스페인 카탈루냐의 한 마을에서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전기에는 그가 애늙은이였다고 나와있는데요. 어른스러운 아이에게 애늙은이라고 하는 그 뜻이 아니라 진짜로 노인처럼 지팡이를 짚고 다녔다고 합니다. 어릴 적부터 류머티즘을 앓아 서있기도 힘들 만큼 아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이가 각별했던 가우디의 둘째 형이 몸이 약한 가우디를 많이 업고 다녔습니다. 각별했던 사이였기에 둘째 형 프란세스크의 죽음은 가우디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습니다.

가우디는 학창 시절 몸도 약하고 성적도 좋지 않았으나 한 날 자신의 친구에게 자신의 그림에 대한 칭찬을 듣게 됩니다. 친구의 칭찬에 그는 건축가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하죠. 바르셀로나 건축전문학교에 입학한 가우디는 건축사 자격을 취득하고 시청 산하의 프로젝트들을 받으며 건축가의 길을 걸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자신의 커리어를 이어나가게 되자 수입이 늘고 약했던 몸도 건강을 되찾았지만 이때 그는 혈기왕성한 나이였기에 밤마다 거리를 누비며 많이 여기저기 놀러 다녔습니다. 술은 약했던 그였기에 주로 미식을 찾아다니며 즐기고 예술가들이 모이는 단골 카페에서 인맥을 넓히기도 했습니다.

그가 유명해진 건 1878년 까사 비센스를 건축하기 시작하면서입니다. 그 후 카탈루냐 명문가 코미야스 후작가의 별장을 건축하며 에우세비오 구엘 백작을 만나게 되는데요. 이 백작은 가우디 평생의 후원자가 됩니다. 가우디는 1883년에 구엘 가의 가문 건축가가 되었고 이때부터 구엘이라는 이름이 붙은 건축물을 건축하기 시작했죠. 이 건축물은 모두 구엘 가문에서 후원해 주었습니다. 이 외에도 그는 유명한 건축가였기에 다양한 의뢰가 들어왔고, 구엘 가문과 연관된 작품 외에도 다양한 작품들을 만들습니다. 그 예로 까사밀라, 까사바트요 등이 있습니다.



까사 비센스(Casa Vicens) 출처:트립어드바이저
까사 밀라 (Casa Mila) 출처: 이지앤북스
까사 바트요(Casa Batllo) 출처:트립어드바이저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

가우디가 1883년부터 평생을 받쳐 설계한 유명한 건축물이며, 현재에도 건설이 진행되고 있는 건축물이죠. 가우디는 이 대성당 건설에 매진했지만 재정문제로 인해 본인 스스로도 자기가 이 대성당의 완공된 모습은 보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었는데요. 그래서 그는 죽기 전에 "나의 후손들이, 다음 건축가가 이 건축물을 완성시키고 이곳에 빛을 내려주리라"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이 성당은 착공 이래 1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 건축 중입니다. 가우디 사망 100주년에 맞춰 2026년에 완공하려 했으나, 코로나로 인해 빠르면 2050년대에 완공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 (출처: 트립어드바이저)

안토니 가우디의 죽음

안토니 가우디는 1926년 6월 성당 미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 카탈루냐 인근의 길을 건너다가 전차에 치여 치명상을 입게 됩니다. 가우디를 친 전차를 운전했던 기사는 가우디가 노숙자인 줄 알고 그냥 길 옆에 끌어다 놓고 다시 전차를 끌고 가버렸는데요. 사고를 목격했던 행인이 가우디를 병원에 데려가기 위해 택시를 찾았지만, 차림새가 볼품없었던 그를 알아보지 못한 택시기사들에게 세 번이나 승차거부를 당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행색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참 좋지 않은 행동입니다. 결국 경찰의 도움을 받아 택시를 잡았고 병원으로 이송되었습니다. 병원에서도 가우디가 노숙자라고 생각했던 의사는 치명상을 입은 가우디에게 아주 간단한 치료만 해주었죠. 이후 가우디의 지인이었던 주임 신부 모센 길파레스가 병원에 방문하였고,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는 가우디를 보고는 빨리 제대로 된 치료를 해야 한다며 닦달했습니다. 하지만 이때 가우디는 이런 말을 합니다. " 옷차림을 보고 판단하는 이들에게, 이 거지 같은 가우디가 이런 곳에서 죽는다는 걸 보여줘라. 난 가난한 사람들 곁에 있다가 죽는 것이 낫다." 가우디는 치료를 거부했고 결국 생을 마치게 됩니다. 그를 죽게 만든 전차 기사는 파직은 물론 구속되었고, 승차거부했던 택시기사 3명도 불구속 입건되었습니다. 가우디의 입원을 거부했던 병원은 어마무시한 배상금을 가우디 유족에게 지급하라는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안토니 가우디의 장례식은 1926년 반국장으로 치러졌으며 시신은 가우디가 마지막까지 열정을 쏟았던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 지하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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